title: 매일 밤, 네 캔 author: Maybe date: 2026-06-19 category: anxiety description: 첫 캔은 맛이었는데, 세 번째 네 번째는 그냥 손이 비는 게 싫었던 거예요. tags: habit, ritual, drinking, evening url: https://persona.love/anxiety/four-cans --- 매일 비슷한 시간에 캔을 땄어요.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 같은 것이었어요. 노트북을 덮고 불을 줄이고, 차가운 캔을 손에 쥐면 그제야 어깨가 내려갔어요. 첫 캔은 분명 맛있어요. 두 번째도 괜찮고요.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는 맛이 아니었어요. 그냥 손이 비는 게 싫었던 거예요. 어제는 네 캔을 다 비우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나는 한 번도, 내가 왜 이걸 마시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 마시는 데는 두 방향이 있다고 해요. 무언가를 향해 마시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며 마시거나. 축하하는 자리,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자리, 하루를 기분 좋게 닫는 한 잔. 그건 향하는 쪽이에요. 조용해지면 떠오르는 생각을 잠깐 덮으려는 한 잔. 그건 도망치는 쪽이고요.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요. 향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사실은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낮이 시끄러울수록 밤의 정적이 더 크게 들렸고, 그 정적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캔을 땄으니까요. --- 술이 채우던 건 사실 술이 아니었어요. 하루를 닫는 의식이었어요. 그런데 의식을 지워버리면, 매일 밤 그 자리가 빈 채로 남아요. 그래서 한 달만 쉬어가기로 했어요. 끊는다는 거창한 말보다, 그 빈자리에 무엇을 앉힐지가 더 어려운 숙제였어요. --- 빈자리에 게임을 앉혀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좀 우스운 게 있어요. 나는 게임을 하면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었어요. 한 손엔 마우스, 한 손엔 캔. 도망칠 곳으로 고른 게, 알고 보니 같이 도망치던 친구였던 거예요. 처음 며칠은 게임이 밍밍하게 느껴질 거예요. 게임이 재미없어진 게 아니라, 게임과 술이 한 덩어리로 굳어 있어서 그래요. 붙어버린 둘을 떼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손이 허전하면 탄산수를 쥐어요. 레몬을 넣은, 조금 쏘는 걸로. 밍밍한 물로는 의식이 되지 않으니까요. --- 아직 며칠밖에 되지 않았어요. 한 달 뒤에 내가 무엇을 알게 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술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닫는 법을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던 건지도 몰라요. 다만 오늘 밤은 캔 대신 차가운 탄산수를 먼저 따놓고 앉아보려고 해요. 하루를 닫는 다른 방법을, 천천히 찾아보는 중이에요. 내일이 어떻든, 오늘은 이렇게 한 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