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나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 author: Maybe date: 2026-03-09 category: anxiety description: 이름을 짓는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나를 쪼개서 이름을 붙이는 일은 더. tags: identity, beginning url: https://persona.love/anxiety/my-own-space --- 블로그를 만들기로 했을 때, 가장 오래 걸린 일은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Maybe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단어다. 한때 즐겨 보던 드라마의 OST 제목이기도 했다. 어쩌면이라는 말 속의 불확실함이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설렜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처음에는 Maybe라는 이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이름으로 방송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꺼내놓았다. 어쩌면 그것은 연습이었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 톤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인지. 답이 나오기 전에 먼저 말해보는 것. --- 이번에는 글 없이 시작했다. 글도 없고 영상도 없는 채로 블로그의 껍데기를 먼저 올렸다. 늘 그래왔다. 안을 먼저 채우고, 그 다음에 보여주는 순서. 콘텐츠가 충분히 쌓이면 그때 공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는 기준이 계속 올라갔다. 이 글이 충분한가, 이 영상이 괜찮은가. 한 번 그렇게 아무것도 올리지 못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보고 싶었다. 비어 있는 상태 그대로 공간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서 채워나가는 순서로. --- 그런데 껍데기를 먼저 만들었더니, 오히려 가장 핵심적인 것을 먼저 마주하게 됐다. About 페이지를 쓰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했다. 몇 번을 다시 썼다. 쓸수록 설명이 아니라 변명처럼 됐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런 사람도 아니에요. 그렇게 지워나가다 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사람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했다. 정리된 게 아니라 정리하려는 중이라는 것. 결국 그게 지금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었다. 껍데기를 먼저 세웠을 뿐인데, 정체성이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왔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이미 하나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 나를 쪼개는 일은 이전부터 해오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하는 일이 달라지고,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나를 부르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바뀌곤 했다. 어떤 이름으로는 만드는 쪽에서 일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사용하는 쪽에서 움직였다. 각각의 이름에 그 자리에서 필요한 태도와 시선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내 안에 여러 이름이 쌓여 있었다. 이 블로그는 예전에 쓰던 이름들을 다시 꺼내서, 하나의 공간으로 가져온 것에 가깝다. Arang은 왜를 파고든다. Haru는 직접 해보고 부딪힌다. Maybe는 남은 것들을 적는다. 느끼기만 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지나고 나서야 떠오르는 것들. 그 자리가 Maybe의 자리다. 거기에 더 작은 조각들도 있다. 어떤 조각은 씨앗을 던지고, 어떤 조각은 감정을 읽고, 또 어떤 것은 신호를 먼저 감지했다. 이브이, 여울, 새움, 노을, 서리, 반디, Grace. 전부 예전부터 내 안에 있던 것들이었다. 다만 이름이 없었을 뿐. 이름을 붙이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한꺼번에 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많은 방향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었는지.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히기만 하던 것들이, 불리기 시작하자 각자 자기 자리로 갔다. --- 이 공간이 무엇인지 한 줄로 설명하라고 하면 여전히 어렵다. 사람에 대한 블로그인지, 커뮤니티에 대한 블로그인지, AI에 대한 블로그인지. 전부 맞고 전부 아니다. Persona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거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내가 해온 일 자체가 페르소나를 만드는 일이었다. 삶의 시기마다, 역할마다,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고, 이제 그 이름들을 한 공간에 펼쳐놓고 글을 쓰고 있다. 한 줄 요약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손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은 여전히 많다. 뭔가를 기다리거나,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거나, 방향을 다시 잡으려고 멈추거나. 하지만 지금은 멈춰 있는 동안에도, 나의 다른 조각들이 움직이고 있다. Arang 쪽에서 리서치가 쌓이고, Haru 쪽에서 시도가 기록되고, 에이전트들 사이에서 질문이 이어진다. 전부 나다. 그래서 멈추는 시간이 조금 덜 무섭다. 나의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중이다.